여성문제의 기원

우리의 관점

불로꿀목 2006. 6. 7. 14:51
 

   우리의 관점

   우리는 여성 연구를 통해 여성의 위치를 확고히 회복해야만 한다.  지금까지 우리나라는, 아니 전 세계는 가부장적 체계 속에서 여성들은 억압을 받고 살아왔으며, 특히나 여성들은 그 사회 속에서 남성들의 성 노리개로서의 존재 가치만을 부여 받으며 살아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남성대 여성이라는 평등하면서도 서로의 부족분을 채우는 상호 보완적인 존재로 여기지 않고 남성 우위의, 그러므로 여성은 남성들 보다 낮은 위치에서 과거에는 재산의 일부분으로 여겨지면서, 그리고 시대가 변화하면서 남성을 돕는 보조자로서, 오늘날에는 남성의 권위에 순종하는 존재로 성 차별화된 모습들만이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았다.  사회전체가 이러한 상황을 이어 가면서 아마도 우리들 뇌 속에서는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다.  따라서 어떤 불이익이 된 상황을 맞게 되더라도 여자니까? 라는 식으로 얼버무리고 말았다.

   과연 성서는 남성과 여성을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성서는 과연 남성을 여성보다 높은 위치에서 말하고 있는가?  성서의 기록들을 보면 이것은 당연한 것처럼 여겨진다.  예를 들면 율법에서 간음하다 적발 될 때 여승은 돌로 쳐 죽여야 하는 규정을 하고 있지만 남성에 대해서는 어떤 규제 조치가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서는 남성과 여성을 동일선상에서 대하고 있음을 우리는 보게 된다.  이러한 사실들을 찾아보려고 하는 것이 우리들의 목적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들이 갖고 있는 선입관으로부터, 그리고 고정관념으로 남아 있는 사상들을 깨뜨리지 않으면 않될 것이다.  우리는 이 글을 통해서 오늘날 흔히 듣고 있는 “여성 상위 시대”라는 의미를 다시 되새겨 보기도 할 것이며, 흔히 말하는 “여성 해방 운동”에 대해서도 살필 것이다.  여성 해방 운동이라는 단어는 사실 우리의 취지에 맞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단어 대신에 “여성 권리 회복 운동”, 즉 여성들이 잃어 버렸던 자신들의 위치를 되찾기 위한 운동으로 사용한 것이다.  특별히 이러한 내용의 전개는 사회 전반적인 것들로부터 찾지 않을 것이다.  오직 성서를 통해서 성서가 말하고 가르치는 대로 여성들의 위치를 찾을 것이다.  그것도 구약에서가 아니라 신약에 국한하여 그 작업을 시도할 것이다.  따라서 어쩌면 우리는 우리들의 소기 목적을 달성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뿐만 아니라 지금가지 우리들이 들어 왔던, 그래서 습관처럼 알고 있던 성서 해석에 있어서 전혀 다른 소리를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그러한 고정 관념으로부터 벗어나서 이 글을 읽어주기 바란다. 

   먼저 우리는 몇 가지 사실들, 혹은 사건들을 통해서 우리들의 생각을 정리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실례들은 우리들의 연구에 큰 도움을 줄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성들의 성차별적인 문제들에 대해서 아무런 감각도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경우가 허다함을 지적할 수 있다. 

   1999년 5월에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를 앞두고 명동 등지에서는 거센 항의 시위가 있었다.  그 주된 내용은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를 통해 더 이상 여성들을 성 상품화해서는 않된다는 것이었다.  우리들은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어떤 시각을 가지고 있는가?  여성들이 아름다움을 추구한다는 미명하에 그것을 나타내려 한다는 것은 본능적인 욕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미의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 하는 것은 우리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과제이다.   우리들의 유행가 중에 “얼굴만 예쁘다고 여자냐 마음이 고와야 여자지”라는 것이 있다.  우리는 사실 여자의 미를 마음에 두고 있다.  그러나 서구 사회에서의 유입된 여자의 미는 외모에 중점을 둔 것이었다.  얼마나 미끈하게 잘 빠졌느냐?  얼마나 얼굴이 예쁘냐?  가슴, 허리, 힢은 어떤 크기가 되어야 몸매가 잘 빠진 것이냐?  그러한 것들은 뭇 남성들의 눈요기이다.  즉 여성의 빠진 몸을 보고 남성들이 군침을 흘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우리들 사회에서도 전혀 여인의 몸매에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겉으로 드러난 것일지언정 우리들의 미는 여성스러움에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여성스럽다는 것에 대하여 다시 한번 주제로 다루어야 할 것이다.  우리들은 “미스 코리아 선발 대회”에 대하여 어떤 견해를 갖고 있는가?  이 행사의 뒷전에서 벌어지고 있는 많은 헤프닝, 아니 검은 그림자에 대하여 생각해 본적이 있는가?  돈 거래와 몸 거래에 대하여 자신 있게 아니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직 당사자들만이 부정할 뿐이다. 

   두 번째 성의 차별화된 여성 경시에 대한 것은 같은 해 5월 중에 우리들의 사회에서 대두된 또 하나의 사건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남창”에 관한 법률 제재 조치였다.   이제까지 여창에 대하여는 사실 관대한 형편이었다.  어쩌다 한번, 즉 일년에 한 두 차례의 집중단속을 통하여 여창들을 단속하였던 것이다.  이 때에 속된 말로 “재수 없는 년”만이 보호소라 불리우는 재활 센터에 들어가게 된다.  근들이 그곳에서 어떤 대우를 받는지 보통의 사회인들은 알 수 없다.  일전에 보도된 사건이나 일들은 아주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그녀들이 그곳에서 나온 후 새 생활을 갖게 되는가?  결코 아니다.  또 다시 여창의 길로 들어 설 뿐이다.  이 문제에 대하여 어떤 남성들이 책임을 지겠다고 나섰는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는가?  그런데 최근에 여성들이 남성들을 상대로 엔조이 하겠다고 나섰으며, 실제로 그러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사회에 이러한 사실들이 알려지자 상당 기간 동안 이 문제가 가시화되어 보도되었고, 세상 말세라는 표현들이 거침없이 나돌았다.  보도된 자료에 따르면 남창을 이용하는 거의 대부분의 여성들 자신의 직업이 남자들에게 스트레스를 받는(소위 술집 여성들)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이들은 자신들이 문을 닫고 거꾸러 남자들을 부려보겠다고 생각하고 그것이 맞아 떨어진 것이 남창이었다고 한다.  이것에 대해 정부는 대책을 세웠다.  어떤 대책인가?  남창에 대하여 벌금 5백만 원을 책정한 것이다.  과연 그것은 올바른 처사였는가?   여창들에 대해서는 특별한 대책을 세우지 않던 그들이 오직 미성년을 고용할 때만, 또는 미성년과 관계할 때만 법적 조치를 취하던 정부가 남창에 대해서는 뿌리를 뽑겠다고 발 벗고 나선 것이다.  물론 우리들 보통 사람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다.  그러나 전반적인 사회 속에서 이는 여성들이 남성들에게 아직도 무시당하며 살고 있고,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남성은 용납이 되고, 여성은 용납이 되지 않는다는 식의 여성 차별화된 사건이다.

   이러한 성 차별은 비단 어제 오늘의 일만은 아니다.  여창에 대한 것은 어떤 면에서는 국가 시책의 한 일환으로 이용될 때가 많았다.   정책적으로 육성된 공창제도(위안부, 정신대등), 관광 수익을 위한 사창제도(미아리, 양동, 청량리 등등)가 비공식적으로 묵인된 것들이었다.  이러한 것은 육성될 당연한 것이고, 남창의 등장은 큰 문제가 된다는 논리는 어디서 나왔을까?  남창이 문제가 된다면 여창도 문제가 되어야 하는 것은 마땅하다.  따라서 지금 당장이라도 정부는 그러한 거리들을 철폐 할 수도 있으나 수수방관만 하고 있지 않는가?  여기에 문제가 등장하기는 한다.  스스로 들어선 사람들(?)의 생사 문제이다.  그러나 그것은 소수에 불과한 것이다. 

   세 번째로 생각해 볼 문제가 있다.  지하철에서 성 추행이 극성을 부리자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나타난 것이 “여성 전용칸”이라는 것이다.  여성 전용칸은 있는데, 왜 남성 전용칸은 없는가?에 대하여 우리는 얼마나 생각을 해 보았는가?  아마도 많은 여성들은 좋은 발상이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이제라도 여성들이 지하철 안에서 보호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과연 그러한가?  왜 많은 여성들은 스스로를 연약한 존재로 전락을 시키고 있는가?  여성들이 나서서 당당히 싸우고 대책을 강구하지 못하고 기껏해야 남성들의 힘을 빌어 기껏해야 보호 받는 약자의 자리를 차지하는가 말이다.  이 시책이 좋은 것인 것은 분명하나 엄밀히 말하면 이것은 여성을 차별화하는 또 다른 하나의 발상일 뿐이다(여성은 여성대로, 남성은 또 남성대로의 차별을 두고 있는 것임).  이미 우리들 사고 속에는 그렇게 굳어져 버린 것이다.  만일 서로 대등하다면 이러한 일들을 통하여 남성과 여성의 전용칸을 각기 만들어야 옳았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생각해 볼 문제는 여성들이 억압만 받고 살다가 어느 정도 지위가 확보되면서 “여성 상위 시대”의 개막을 알리게 되었다.  이것은 여성들의 끊임없는 투쟁의 결과로 확보한 쾌거인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힘들게 얻어낸 이 귀한 지위가 여성들 스스로에 의해서 사실 무너지고 있다는 것이다.  여성들 스스로 이 지위를 거부하고 있다.  남녀평등을 주장하는 여성들 스스로가 여성은 남성의 보호를 받아야 만하는 존재로 스스로 전락시키고 있다.  말로는 평등이고, 실전의 삶에서는 피보호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자신들의 지위 확보를 위한 투쟁이 아니라 한 순간의 자신의 명예욕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여진다.  예컨대 자녀 출산에 있어서 여성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가진 고정관념을 깨뜨려야만 한다.  아들이나 딸이나 똑같다고 하면서 실제 출산에 있어서 딸을 낳았을 때의 기죽음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몇 해 전 백 말띠 출산의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태아가 희생되었는지는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여자 아이가 백 말띠면 거세기 때문에 지워야 한다고 해서 일어난 일들이었다.  이미 수 백년, 수 천년을 지나면서 굳어진 생각들이 몇 년, 아니 몇 십년의 노력으로 모두 해소한다는 것은 기대하기 어렵지만 그래도 그 운동을 하는 자들은 이럴 때에 분노해야 하지 않겠는가?  여성 스스로 여성을 낮게 여기는 풍토가 사라지기까지는 참으로 여성의 권리를 회복한다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여성들이 자신들의 입을 통해서 “나는 여자니까”라는 말은 영원히 사라져야 할 단어이다. 

   필자는 지금까지 우리들의 삶의 현장 속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몇 가지 사실들을 지적하였다.  남자나 여자나 다 같은 평등한 사회가 정상 사회인데 반하여 우리들이 현재 살고 있는 이 세상은 그렇지 못하다.  어느 한쪽이 심한 차별을 받아왔고(물론 그 가운데는 반대로 남성이 차별을 받는 경우도 있으나 일반적인 현상을 말하는 것임), 따라서 우리들의 삶 속에는 이것들 외에도 상당히 많은 문제들이 산재하여 있다. 

   우리는 가부장적 사회를 벗어나 남녀가 평등하다는 기본 전제 아래(사실은 전제까지도 필요 없다.  사실 하나님은 인간을 그렇게 만드셨다) 잃어 버려진 여성들의 지위를 회복하고자 하는 열망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성들 스스로부터 자신들의 사고를 바꾸어야만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결코 이 대업은 이룰 수가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미 기득권층에 있는 남성들이 양성평등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여성학은 여성들만을 위한 학문이 아니라 남성에게도 똑같이 필요한 필수적인 학문이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