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신약신학

로마서 7:25절 주석

불로꿀목 2008. 4. 2. 23:32
 

                            바울의 인간론에서 본

로마서 7:25절에 관한 주석


서론

“신약성서 전체 가운데 철저히 일관되게 생각해 낸 「인간론」이라고 부를 만한 것을 설명한 사람은 바울뿐이다.”라고 케제만은 말하고 있다.1) 이는 곧 바울만큼 인간 이해를 돕는 다른 성서의 저자가 없다는 말이다. 또한 불트만은 “바울의 신학은 그의 인간론으로 다루어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했다.2) 물론 불트만의 견해를 따를 수는 없지만 바울의 신학을 그의 인간론에서부터 보았다는 것은 바울의 인간 이해가 그의 신학에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반영해 주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바울을 아는 사람들과, 또한 바울 자신이 이렇게 중요하게 생각했던 인간론은 복음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따라서 바울의 인간론을 연구하는 데는 그의 복음의 신학을 이해하는데 중요할 뿐 아니라 특히 로마서를 이해함에 필수적이라 생각된다. 더욱이 본 연구에서 행하려는 롬 7:25절에서 바울은 인간의 두 면을 설명하고 있는데 그의 인간 이해 속에서 어떻게 이 구절이 가능한가를 찾는 것은 중요하다고 판단된다.

그러므로 본 연구는 제 1장에서 바울이 로마서에서 언급하고 있는 인간에 대한 표현상의 용어들을 살펴봄으로 인간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고찰하고,

제 2장에서는 바울이 로마서에서 표현한 인간에 관한 용어들 속에서 구체적으로 인간을 이해하는 바울의 두 관점, 즉 옛 사람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사람에 대해 살펴보며,

제 3장에서는 이러한 바울의 인간 이해 속에서 본문의 주석을 하려고 한다. 본문 주석에 앞서 본문에서 말하는 “나”라는 존재에 대해 먼저 살피고, 주석을 하되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 8장이해 까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이해를 위해서는 그것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결론에 가서는 본문과 바울의 로마서 집필 목적이 갖는 관계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재확인하면서 전체적인 요약을 하려한다.  이러한 연구를 위해 연구자는 되도록 로마서를 벗어나지 않으려 한다. 로마서에서 말하는 바울의 인간이해를 찾고 거기서 해답을 얻을 것이다.



제 1 장  로마서에 나타난 인간에 관한 용어 고찰

바울은 로마서를 쓰면서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인간에 대한 기록을 하고 있다. 외형적인 인간에 대해 말하기도 하고, 내적인 인간의 모습을 그리기도 한다. 바울의 인간에 대한 표현은 상당히 복잡하다. 그러면서도 일목요연하다. 따라서 본 절에서는 바울이 로마서에서 사용한 인간에 관한 용어들을 찾아보고자 한다.


1) soma와 sarx(몸과 육신)

소마는 body로서 몸을 나타낸다. 약 11회 사용되었다. 반면 소마와 같은 의미를 가지면서도 차이를 보이고 있는 육신을 나타내는 사륵스는 소마보다 훨씬 더 많이 사용되었는데 약 21회가 사용되었다.

 육신은 인간의 전체적인 면을 나타낸다. 거듭나지 못한 연약하고 사악한 인간이다. 역시 몸도 같은 의미를 가진다. 그래서 이 둘은 육적인 의미에서는 구별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둘의 윤리적 의미에서는 서로 달리 사용된다. 육신은 하나님과 거리를 두고 있는 인간으로서 곧 죄의 인간으로 나타나며, 몸은 죄의 인간이지만 하나님을 위해 만들어진 인간을 나타낸다.3) 몸이 육신과 다른 점이 있다면 육신은 멸망으로 끝날 것인데 반하여, 몸은 멸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 되어질 때에 몸과 육신은 구별이 된다. 그래서 몸은 죽어도 다시 부활할 것으로 나타난다(8:11).4) 곧 죽는다는 데는 차이가 없으나 몸은 살아야 할 몸으로서 이해되어지고 육신은 죽음 거기서 끝이 난다. 부활한 몸은 변화된다. 그 변화는 영적인 변화가 아니다. 몸이 썩지 아니 할 몸으로의 변화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위한 인간이다. 그래서 몸은 영과 일치되는 실체로서, 그리고 육신은 영과 대조되는 실체로서 바울은 각각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2) kardia와 suneidesis(마음과 양심)

마음의 뜻을 가지는 카르디아는 26회가 사용되었고, 마음과 같은 맥락의 양심은 3회가 로마서에서 사용되었다. 바울은 마음과 양심이라는 두 단어를 한데 모아 사용함으로써 이 둘 사이의 관계를 보여주는 동시에 또한 그 차이를 표현하고 있다.

바울은 마음과 양심의 언어를 통하여 마음은 자기의 가장 깊은 내적 존재로서 밝히고 있으며, 양심은 자기의 윤리적인 증거를 주는 인간의 요소로서 말한다(9:1,2).

카르디아는 영역에서 둘로 구분하여 번역되고 있다. 하나는 mind이고, 다른 하나는 heart이다. 이것이 우리 성경에서는 「마음」으로 번역된다. 로마서에서 약 26회 사용되는 이 말은 하나님의 마음을 1회 언급하고(8:27), 예수의 마음에 관해 1회 언급된 것을(11:34) 제외하면 24회는 인간에 관해 사용되고 있다. 이 용어는 인간의 내적 요소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이 마음은 둘로 구분이 되는데 하나는 어두운 면에서 설명되어지고5) 다른 하나는 밝은 면에서 설명된다.6) 그러면서 둘이 동시적 면에서 사용되기도 하였다.7)

어두운 면은 죄와의 관계이다. 바울은 인류의 부패와 타락을 묘사하면서 이들의 생각이 허망하여지고 그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다고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셨다고 하였다(1:21,24).   죄인들이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것을 보면서 바울은 이들의 고집과 회개치 아니하는 마음이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스스로 쌓는다고 하였다(2:5).8)

반면 밝은 면은 하나님과 관계한다. 마음은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그 위에 기록하고 있다. 영적인 성질을 가진 문제들은 마음에 관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순종, 기도, 믿음은 모두 그 근원을 마음에 가지고 있다. 하나님은 마음을 이끌어 하나님을 사랑케 하시고 그리스도를 향한 신실함으로 인도하시는 것이다(8:27). 이는 성령께서 마음을 통하여 사람들과 접촉하신다는 진리를 우리에게 깨닫도록 하여준다. 실제로 그는 마음속에 거하신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을 통하여 마음속으로 쏟아져 들어온다고 표현할 수 있다. 바로 그 분께서 우리의 마음을 통하여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으신다(8:15,16).9)

   이 마음은 자신의 의지로 선한 것과 악한 것으로 결정된다. 자신이 결정한 마음을 하나님은 변환시키지 않으신다(1:24). 자신이 정한 마음대로 하도록 하나님은 내버려 두신다. 그러므로 바울은 마음을 선한 방향으로 하라고 권면한다. 「할례는 마음에 하라」(2:29),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라」(10:9), 「높은 마음을 품지 말라」(11:20, 12:16),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12:2),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하라」(14:5).

그 반면에 양심이 수네이데시스는 내 의지와는 별개의 것이다. 3회를 기록하고 있는데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2:15),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라」(9:1), 「노를 인하여 할 것이 아니요 또한 양심을 인하여 할 것이니라」(13:5)”라고 하고 있다. 여기서 찾아지는 것은 양심이 자신의 의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요 그 자체로서 기능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인간의 가장 내밀한 존재 속에서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을 의식하고 있는 것이 마음으로서 그것을 알게 하는 것이 양심이다. 따라서 그 양심이 증거가 되는 것이다(2:15).

바울은 인간이 그 양심을 인하여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순종할 의무가 있음을 거듭 주장한다(2:15, 13:5).10) 이 순종은 자신의 의지로 할 수 있거나,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니다. 순종하지 않아도 그 양심은 살아 있어서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알려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양심대로 하지 않음으로 이 양심이 “화인 맞은 양심”이 되었다. 이것은 악한 마음에서 기인된다.  즉 죄가 양심에 미치는 영향으로서 마음에서 양심으로, 양심에서 믿음으로, 거기서 사랑으로 연결되는 것인데(딤전 1:5), 인간의 의지로 인하여 마음을 죄에 굴복시킴으로 양심이 화인 맞게 된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양심은 본래적인 것이며, 마음은 의지적인 것이다. 즉 마음의 중심은 양심이다. 양심을 둘러 싼 것이 마음이다. 그러므로 마음과 양심은 동일한 의미이면서도 차이가 있는 것이다.


3) psyche와 pneuma(혼과 영)

바울은 프쉬케를 생명이라고 표현했다. 엘리야가 「내 목숨도 찾나이다」라고(11:3) 불평하고 있는 구약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생명임을 분명하게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이것을 구약의 네페쉬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롬 2:9에서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이라고 할 때 사용되어졌다. 따라서 이것은 개인을 의미한다. 역시 13:1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는 인간의 생명력을 가리킨다. 따라서 인간의 죽음과 관계된다. 즉 인간의 죽을 육과 관계하는 것으로 인간은 혼이 떠남으로 육신이 죽는 것이다.

반면에 프뉴마는 죽을 육신과 관계하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영생과 관계한다.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았든지, 아니면 양자의 영을 받았든지 간에(8:15) 육과 함께 죽을 것이 아니요, 영원히 살아야 하는 영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을 받으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14). 하나님의 아들인 까닭에 양자의 영을 받아 아바 아버지라 부른다(15). 이 때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으로 더불어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는 것이다(16). 영은 구약의 루아흐와 비슷한 용법으로 사용되어진다. 물론 로마서에서 많은 부분이 하나님의 영과 그리스도의 영, 그리고 성령의 영으로 나타나 있으나 인간에게 사용되어지기도 했다. 그리스도의 영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의 영과 함께 하신다(1:9). 그러므로 인간은 영과 혼이 따로 구분된다.



제 2 장 로마서에서의 바울의 인간 이해

로마서에서 나타난 바울의 인간에 대한 이해는 보다 광범위하다. 앞에서 이미 살핀 바와 같이 바울은 인간을 나타내는 용어들 자체에서도 다각도로 설명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인간에 대해 바울은 「옛 사람」과 「새 사람」이라는 개념적 표현을 쓰고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이전의 상태인 구원 받지 못할 옛 사람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이룬 새 사람인 것이다.11)


1) 옛 사람

그는 자신의 회심 이전의 사망의 속박 아래서 말할 수 없는 고뇌 가운데 살았던(7:24) 반면, 회심 이후 그의 생은 기쁨과 평안과 감사로 넘친 것이었고 이러한 자기 자신의 경험을 통해 인간을 구원받지 못한 사람과 구원 받은 사람이란 이중 구조로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구원 받지 못한 상태의 인간을 가리켜 옛 사람(6:6)이라고 한다. 옛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항상 하나님과 대립하여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려고 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러한 인간은 죄, 율법, 육 그리고 세상의 지배 아래 있으며 내면적으로는 늘 분열되어 갈등하고 있다. 옛 사람에 대한 바울의 언급은 3회 나타나는데 그 중 1회만이 로마서에서 발견이 된다(6:6). 그 옛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1) 죄 아래 있는 인간

그래서 바울은 인간을 죄 아래 있는 존재로서 말한다. 죄는 한 사람으로부터 세상에 들어왔고, 그것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게 되었다(5:12). 죄의 기원은 피조 된 인간이 인간임을 거부하여 그 이상이 되려는 데서 기인한다. 그러나 인간은 인간 이상이 된 것이 아니라 인간 이하가 되고 말았다.12) 바울은 이 죄 아래 있는 인간을 이렇게 표현한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치 아니하고 되어 원치 아니하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7:19~20). 죄는 인간이 책임을 져야할 것인데 사람이 능동적으로 하나님께 반항하고 적극적으로 범죄하였기 때문이다(1:18~32). 그리고 그 책임과 함께 하나님의 형벌을 면할 수 없을 뿐 아니라(3:19), 언제나 오염을 동반한다. 즉 아담 안에서 범죄 한 모든 사람은 부패한 성격을 갖고 태어난다(8:5~8). 그 결과 인간은 사망을 얻게 되었다(6:16, 23).


(2) 율법 안에서의 인간의 존재

바울은 회심 이전에는 철저하게 율법에 얽매인 율법의 종이었으나 회심 이후 예수의 종이 되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율법 아래 있는 인간을 구원받지 못한 옛 사람이라고 한다(롬 6:6).

율법에 관한 바울의 사상은 다소 복잡하고 다양하다. 바울에 의하면 하나님은 유대인분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율법을 주셨다고 한다. 하나는 시내산에서 주어진 돌판에 새겨진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마음에 쓰여진 것이(롬 2:14~15). 이방인의 양심에 쓰여진 율법은 인간을 구원하는데 무력한 것이다. 양심이 선악을 판단하기는 하나 선악의 절대적인 법이 될 수 없으며 양심의 법과 하나님의 의지가 동일한 것은 아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율법의 의의를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것”으로 말한다(7:12). 그러나 이 율법은 갈라디아서에서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갈 3:24)이다. 이로 보건대 율법은 그 한계성을 지니고 있다. 즉 율법은 인간을 구원해 줄 수 없는 것이며 다만 인간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여 구원을 얻도록 하는 것이다. 이에 관련되는 것으로 율법은 죄를 인식케 하는 기능을 갖는다(롬 3:20). 인간이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않았다(롬 5:13). 그러나 율법이 모든 인간에게 죄가 있음을 알려 주었다. 결국 율법이란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것이며 인간에게 죄를 깨닫게 하여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것일 뿐 구원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

죄로 인해 하나님과 분리된 인간은 하나님의 법을 이룰 수 없으며 또한 죄로 인한 자아의 분리는 자기 통찰력을 상실하여 내적 갈등과 분쟁으로 무력해지며 죄로 인한 인간 상호간의 분리는 관계적 존재인 인간관계성의 파괴로 자기 파멸에 빠진다. 이런 사실은 누구보다도 율법을 철저히 지켰던 바울의 고백에서 분명해진다(롬 7:18~24). 바울은 자신의 체험을 통해서 율법이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고 말한다(롬 3:28). 인간은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해 율법의 마침이 되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의해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롬 10:4).

바울은 죄와 율법의 관계를 설명함에 있어서 율법이 있기 전에 죄가 있었지만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했다(롬 5:13). 하나님은 율법을 통하여 모든 인간이 죄를 알게 하셨다(3:20, 7:3). 그러나 율법은 범죄를 막는 힘이 없으며 오히려 죄를 짓도록 유혹하는 것이다. 바울은 그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 하지만 그 범이 죄의 법에 끌려가는 자신을 막지 못하는 것을 경험에 의해 설명하고 있다(7:22~23). 또한 그는 탐심을 갖게 한다고 하여 율법이 죄를 짓도록 충동하는 것을 말한다(7:7). 율법은 죄를 심히 죄 되게 하는 것으로(7:13) 죄를 드러낼 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 죄를 증가시킨다(5:20). 죄는 기회를 타서 율법으로 인간을 죽음에 이르게 한다(7:11).

이런 사실들을 미루어 볼 때 바울은 율법 자체가 죄라는 것을 특히 거부한다. 죄는 율법이 있기 전에 이 세상에 있었다는 언급을 한다(5:13). 이는 율법과 죄를 동일시하기를 거부하는 바울의 입장이다. 율법은 죄를 알게 한다. 바울에게 율법은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것이로되 간접적으로 그리스도에게로 안내하는 기능을 갖는다. 따라서 율법 안에서의 인간은 죄를 알고 그것을 통하여 구원을 얻으려는 자가당착에 빠질 뿐이지 결코 구원을 얻을 수 없는 존재이다.13)


(3) 육에 속한 인간의 존재

바울은 육에 속한 사람은 옛 사람이라고 말한다. 육이란 하나님을 떠난 자연적이며 지상적인 인간 본질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자신의 도덕적 혹은 종교적 노력으로 살아가려고 한다. 이는 하나님의 성령에 대립하는 것이다(8:9). 육이 죄의 자리 또는 죄의 지배 아래 있다는 것은(7:14,25; 8:3) 죄의 종이 된 인간 실존을 의미한다(6:6). 이 죄는 모든 인간을 지배하여 온갖 죄악을 범하게 하는 실제적 힘이다. 따라서 바울은 육신을 지배하는 죄로 인해 분열된 자아의 고통을 토로하고 있다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따르고 선을 행하기를 원하나 그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죄로 인해 악을 행하게 되는 실존적 체험을 고백한다(7:14~25). 또 바울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인간들이 필수적으로 저지르게 되는 온갖 죄악을 기술하고 있다(1:28이하). 죄가 육을 지배하고 있으므로 소욕을 따라 사는 것은 성령의 소욕을 거스리는 것이며, 육체의 일이란 온갖 죄악을 저지르는 것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할 수 없다. 육을 따라 생각하는 것과 사는 것은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다(8:5). 이런 사실로 미루어 바울은 육이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자연적이며 지상적인 인간이며 죽음의 속박 아래 있는 삶의 원리로 생각한다.14)


2) 복음 안에서의 인간의 존재(새 사람)

옛 사람은 그 마지막이 사망이다. 그러나 옛 사람이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영생을 얻게 된다. 복음을 통하여 그것을 받는 사람은 이제 새 사람이 된다. 새 사람은 의인으로 불리 운다. 로마서의 전체 주제가 「이신득의」인 것과 같이 사람이 예수를 믿음으로 의인, 즉 새 사람이 된다. 과거의 인간이 아니다. 이제는 예수의 피를 인하여 의롭게 되었다(5:9). 예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 되게 하셨고(5:11), 그의 긍휼하던 존재가 그것에 대하여 해방되었는데(7:6), 인간을 얽매이게 했던 율법이 아닌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남으로(3:21) 구원 받은 백성이요, 복음 안에서 새 사람이 되었다.

바울은 죄와 죽음 아래 있는 구원받지 못한 옛 사람에 대조하여 구원받은 새 사람을 말한다. 새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존재이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라는 말을 그의 서신에서 자주 쓴다. 그래서 갈 2:20절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따라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간이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에 참가한 인간을 의미한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사는 경험의 외적 표현이며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보증하는 세례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4:11).

로마서의 5장에서 8장까지를 보면 5장은 죄에서의 자유, 6장은 진노로부터의 자유, 7장은 율법으로부터, 8장은 죽음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한다. 즉 「하나님의 진노는 죄로부터 출발하고 그 죄는 율법을 통하여 깨닫게 되며 죄의 결과로 죽음이 있게 된다. 따라서 이런 것들로부터의 자유를 그리스도인이 갖게 됨을 말한다.」이 자유자가 곧 새 사람이다. 결국 사람이 사람답게 되는 것은 복음 안에서만 가능한 것을 말한다. 이것이 복음 안에서 인간에게 나타나는 축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속에는 육신의 일과 영의 일이 공존한다(8:5이하).



제 3 장 바울의 인간론 속에서의 본문 주석

1) 본문의 “나”는 어떤 존재인가?

본문에서 “나”는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긴다고 한다. 여기서 나는 어떤 사람인가? 중생하기 전의 사람인가? 아니면 중생 후의 사람인가? 즉 바울의 회심 전 상태인가? 아니면 회심 이후의 존재를 말하고 있는지 먼저 살펴야 한다. 이를 이해하려면 14~25절 전체에서의 나를 살피지 않을 수 없다.

14~25절까지의 해석은 신약연구에 있어서 가장 열띤 이슈중의 하나가 되고 있는 본문이다. 이것은 이미 1세기에서부터 문제가 되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이 본문에서 말하는 “나”라는 존재가 과연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이다. 이것에 대한 이제까지의 연구는 서로 다른 시대와 종교적 사상적 배경을 가진 주석가 들이 일반적인 인간의 삶과 기독교적인 삶에 관하여 허다한 관점들, 가정들 및 기준들을 표준으로 하여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추구하여 왔다.15)

해석의 입장을 보면;

(1) 중생한 관점에서 본 중생 이전의 상태를 나타낸다는 입장이다. 20세기의 신학계에서는 이 견해를 주로 받아들인다. 큄멜, 불트만, 알트하우스 등이다. 따라서 여기서 나의 갈등은 결과적으로 중생하지 못한 자의 것이 된다.16)

(2) 중생한 자로서 현재 자신의 실존의 모습을 보는 입장이다. 니그렌, 크랜필드, 던 등은 (1)의 지배적 견해를 지지하지 않고 거듭난 자의 고뇌라고 주장한다.17)

(3) 중생전의 사람이라는 입장이다. 이는 초대교회의 주석가 들은 대부분이 죄와 율법의 세력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는 중생 체험 이전의 사람이라고 간주했다.18)

연구자의 견해는 2번째와 같다. 신앙인이 경험되어질 수 있는 부분으로서 중생한 자가 성령의 강한 영향력 아래에서 열려진 그의 눈으로 바라본 자신의 실존적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신앙인이 중생했다고 해서 모든 죄와 율법으로부터 자유 했다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아직까지 중생을 했다 하더라도 세상에 속하여 살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갈등하는 “나”라는 존재가 세상의 유혹의 죄에서 갈등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갈등은 죄에 대한 자신의 무능함에 대한 갈등이다. 따라서 자신의 실존적 모습은 죄에 대한 무능함의 발견이다.


2) 본문(25절) 주석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이미 앞에서 살핀 바 마음은 하나님의 법을 따르기를 원하고 있다. 이것은 자신의 의지로 이루어진다. 마음의 의지는 하나님의 법을 따르기를 원한다. 그럼에도 마음은 의지로이루어지기 쉽지 않다. 왜냐하면 행동이라는 것이 뒤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행동의 의지는 마음의 의지를 따르려 하지 않는다. 아마도 이것은 예수께서 하신 말씀 속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마 26:41). 곧 육신과 관계되는 행동은 마음이 가지는 것과 반대로 향하여 나가려 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죄 때문이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를 띄우면서 “경계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딤전 1:5)이라고 했다. 곧 마음과 양심에 이은 사랑이라는 행동이 이어지는 것이 경계의 목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양심을 거부함으로 믿음의 파선을 가져왔다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의지적 마음이 양심을 거부한 것이다. 그 결과 행위인 믿음이 파선된 것이다. 이것은 죄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신앙인이 이렇게 갈등을 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보웬은 이것이 기독교인의 정상적인 삶이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19) 첫째, 본문에 서술된 인간이 8장에서 언급된 크리스챤과 꼭 같다는 것이다. 그는 마음으로는 율법 편에 굳게 서 있다. 이 율법은 신령한 것이고(7:14,25; 8:5), 그는 그의 구원이 완성되기를 바라면서 신음하고 있다(7:24; 8:25). 그는 이 구원의 소망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찬양을 드린다(7:25a; 8:25). 둘째, 참다운 크리스챤이라면 누구나 이렇게 느낄 수밖에 없다. 셋째, 이런 갈등상태의 원인은 크리스챤이 동시에 두 세계를 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브루스도 같이 생각한다.20)

이런 죄는 어떤 유형인가를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을 듯 하다. 이 죄는 세상 유혹의 죄가 아니다. 신자가 가지는 죄에 대한 무능함과 무력함이다. 이 무능으로 인하여 신자는 갈등을 하는 것이다21). 따라서 본문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거치는 성화의 한 단계에 해당한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중생자는 영적인 깊이를 더하며 성숙의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다.22) 이것을 더 자세히 알기 위해서는 8장을 이해할 때 확실해 진다. 사실 본문의 이해는 8:4절까지를 포함한다. 8:1~4절에서 갈등의 문제가 어떻게 해결되는지를 말하고 있다. 그 뿐 아니라 율법으로부터, 죄로부터 왜 자유함을 얻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해 주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이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셨다. 따라서 8:5절 이하는 그리스도인의 직접적인 경험에 대한 내용이다. 즉 영의 일과 육의 일로서 이런 갈등의 문제에 대한 극복의 해결책이 15절 이하에서 나타나는데 바로 성령에 의해서 가능한 것이다.23) 그러므로 본문은 복음 안에서만 이해 가능한 것이 된다. 복음 안에서의 새 사람이 얻는 축복인 것이다.


결론(본문과 로마서의 목적과의 관계성 확인 및 요약)

본문은 기독교인의 삶의 모습임을 확인하였다. 이것이 로마서의 목적과 어떤 관계성을 유지하는지는 확인하는 것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로마서의 집필 목적 속에 본문이 있기 때문이다. 로마서의 집필 목적은 여럿이다. 그 가운데 바울의 선교계획이 한 부분을 이룬다. 바울은 아직 로마에 가 본 경험이 없다. 그럼에도 그는 로마교회에 자신의 선교 계획을 밝히고 있는데, 곧 로마교회를 거쳐 서바나로 가려는 계획이다. 왜 바울은 로마를 거쳐 서바나로 가야할 계획을 세웠는가? 그것은 거기서도 복음을 전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직 그들은 옛 시대에 속한 옛 사람들이다. 그들은 멸망의 자리에 있을 뿐이다. 하나님은 모든 자들이 구원 받기를 원하신다. 아직 본문의 갈등을 경험하지 못한24) 그들에게 본문의 갈등을 경험케 해야 하는 것이 이방인의 선교사인 바울의 할 일이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할 일이 있는데 그것은 예루살렘교회에 이방인 교호에서 모금한 헌금을 전달하는 일이다. 바울은 이 일들을 위해 로마교회가 기도해 주고, 돕기를 원한다.

갈등이 좋은 것은 아니지만 갈등을 하는 것이 구원의 길이다. 이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것에 자유를, 승리를 할 수 있다. 이방인들이 이 귀한 축복의 자리에 들어와야 한다. 따라서 본문은 바울의 선교목적과 끊을 수 없는 것이다.25)

이제까지 논의 되어진 바울의 인간론 속에서의 롬 7:25 주석은 그리 쉬운 작업은 아니다. 1장에서 바울이 인간에 대해 사용한 용어들을 로마서에서 찾아보았다. 많은 그의 표현 가운데 몸과 육신, 마음과 양심, 혼과 영에 국한 시켰다. 몸과 육신은 모두 죽는다는 데는 차이가 없다. 그러나 육은 죽음으로 끝나고, 반면 몸은 다시 살 수 있는 것으로 이해되어졌다. 마음과 양심은 같은 의미이지만 양심은 본래적인 의미로서의 마음이며, 마음은 양심을 덮고 있는 의지적인 것으로 이해되어졌다. 혼과 영에 대해, 특히 혼에 있어서 바울이 로마서에서 많은 사용은 하지 않는다. 그러나 혼은 생명력을 의미하였으며, 영은 영원성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였다. 그렇게 바울이 이해한 인간은 영과 혼을 가지고 있으며, 마음과 양심, 몸과 육을 가진 것으로 말한다. 이 관계성을 밝힌다면; 영은 영생, 곧 지옥이나 천국에서의 영원한 삶을 이끄는 것이며 몸과 관계한다. 반면 혼은 세상에서의 생명(삶), 또는 죽음으로 이끌며 육신과 관계한다.

2장에서는 로마서에서의 이런 표현들의 종합과 함께 전체적인 인간의 모습을 설명했다. 그리스도 밖의 인간과, 그리스도 안의 인간으로서 옛 사람과 새 사람에 대한 것이다. 옛 사람은 죄 아래 있는 인간의 실재이며, 율법 안에서 자신을 스스로 구원할 줄로 믿는 인간의 실재, 따라서 이런 인간은 육에 속하여 죄 아래 사는 인간이다. 반면에 새 사람은 복음 안에서의 인간으로서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백성이다. 그러므로 죄와 진노와 율법과 죽음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은 인간이다.

3장에서는 바울의 인간론 속에서 롬 7:25절의 주석을 시도했다. 본문에서 나라는 인간은 중생한 자이다. 중생한 자가 자신의 과거와 현재의 삶을 영적 통찰력을 가지고 보면서 갈등하는 것이다. 자유를 얻은 인간이지만 그 자유가 완전한 것은 아니었다. 성화의 과정을 통하여 완전한 인간이 되기 때문에 아직은 갈등을 하고 있다. 왜냐하면 새 사람이 두 세계에 살기 때문이다. 즉 영의 세계와 육의 세계이다. 그러나 이 갈등은 성령에 의해 해결됨을 살폈다.

인간은 둘로 구분이 된다. 하나는 옛 사람이요, 하나는 새 사람이다. 옛 사람이 새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복음만이 가능하다. 이 복음을 듣지 못해 새 사람이 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빚진 자로서의 먼저 된 신자의 잘못이다. 따라서 바울은 이방인의 선교사로 부름을 받은 것과 같이 이들에게 복음을 전해야만 했다. 그것을 위해 로마교회가 도와주기를 바라면서 기도를 부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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