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기독교 세계관에서 본 여성 문제의 기원
기독교 세계관은 이러한 사실들을 인정 할 수 없다. 성경은 남성과 여성이 원래는 평등하게 창조되었음을 인정하지만,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여성이 남성에게 귀속되었음을 밝히 증명하고 있다. 물론 하나님의 백성들 속에서는 계속된 평등이 원칙이었으나 세속 문화에 신앙 문화가 물들어 갔다고 보는 것이 좋을 듯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가르침은 평등을 유지한다. 사람들의 사는 모습은 변해도 성경의 가르침, 즉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의지는 하나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사실들을 성경에서 찾아보려고 한다. 과연 여성학을 연구하는 자들의 논리와 같이 진화론적인 경로를 갖는지? 아니면 전혀 다른 원인을 갖는 것인지 성경 안에서 밝혀 보자.
남성과 여성의 문제에 관하여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특히 여성이 남성의 지배 아래, 혹은 예속의 관계로, 혹은 속박의 관계가 되는 억압을 당했는지, 과연 성경은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하여 성경에서 어렵지 않게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고, 창조의 마지막에 인간을 만드셨다. 남성과 여성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그들이 서로 돕고 사는 존재로, 사로의 부족을 채워주는 상호 보완적인 관계로서 창조하셨다. 아담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남성의 뼈를 취하여 여성을 만들었고, 남성인 아담은 여성 하와를 보고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로다.”고 여성을 보고 감탄을 했다. 그들은 인류의 첫 부부요, 가정이었다. 결코 세속적인 세계관을 가진 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집단 혼”이라는 것에 대하여 성경은 전혀 밝히지 않고 있다. 처음부터 남녀는 일대 일의 결혼 즉 일부일처제로 시작하고 있다. 에덴에서의 이들 부부 간에 자녀의 문제는 전혀 언급이 없으므로 과연 자녀들이 노동의 도구로써 생각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자녀들의 생산이 에덴에서는 결코 없었다는 사실이다. 에덴에서 쫓겨난 이후 그들에게는 자녀가 처음으로 생산이 되었다고 성경은 밝히고 있다.
처음 인간은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신 에덴동산에서 살았다. 에덴동산은 따로 노동을 해야 하는 수고를 전혀 제공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로 얻어졌다. 남녀간의 평등은 이 시대에 국한된다. 남성이 여성보다 지위가 높다거나, 여성이 남성보다 지위가 높다는 식의 설명은 전혀 필요가 없다. 대등한 존재로서 돕는 배필의 역할이 여성의 역할이었을 뿐이다.
우리는 여기서 “돕다”라는 의미를 생각해 보아야만 할 것이다. 분명히 하나님은 여성을 남성의 돕는 배필로 만드셨다(창세기 2장 18절). “돕다”라는 말의 영어는 Help로서 히브리어 에제르이다. 에제르는 아자르에서 유래하는데, 아자르는 ‘더하다, 도움을 주다, 도움을 받다’라는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에제르는 남성 명사로서 ‘원조, 도움, 원조자, 조력자, 여성 조력자’의 뜻을 갖는다(풍만사전 p. 448.). 이 단어는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돕는 분”으로 20여회 이상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결국 여성이 남성을 돕고만 살고, 남성은 여성에게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는 것을 가리키지 않는다. “돕는다”라고 하는 말을 어떤 행위자의 보조자, 자동차의 부속품, 엔진을 가동시키기 위한 윤활유의 역할로 이해하면 않된다. 약자가 강자를 도울 수 있겠는가? 도리어 강자가 약자를 돕는 것이다. 강하신 하나님께서 약한 인간을 도우신다. 물론 그렇다고 여성이 강자로서 약자 남성을 돕는다는 것으로 이해해서도 않되는 것이다. “돕고 의지하며 살도록 만드신 것이 여성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남성과 여성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루는 것이다(창세기 2장 25절). 결코 창조의 원리에서 돕는 배필이라고 하여 남성 우월의 사상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창조의 질서와 상반된, 남성과 여성의 문제가 죄를 범하는 결과로써 나타난다. 즉 타락 후에 주어진 성별 차이를 성경은 밝히고 있는 것이다. 뱀의 유혹을 받은 하와는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어버렸다. 자신만 먹고 그쳤다면 문제는 달랐을 것이다. 그런데 여자는 자신의 남편에게도 자신과 똑같이 죄를 범하도록 유도하고 말았다. 창세기 3장 16절에 의하면 “여자는 남자를 사모하며 살고 남자는 여자를 다스릴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 죄의 결과로 하나님께서 여자에게 주신 형벌이다. 그러므로 여성이 남성으로부터 억압을 받고 살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죄를 범한 여성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로 성 차별이 시작된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사모하다”라는 말과 “다스리다”는 말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겠다. 사모하다로 번역된 원문은 “테슈카로서 이는 ‘갈망, 열망, 사모, 소원’의 뜻을 갖는다. 이 말은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한데, 랑게는 ”여자가 남자를 의존하고 싶어함(사모함)을 의미할 수 있다“고 했다(랑케 . p. 351.). 즉 그리워하는 것이다. 반면에 케일과 델리취는 ”어떤 물건을 열렬하게 갈망하다는 뜻의 슈크(קוּשׁ)에서 유래된 말로써 여자의 욕망“으로 이해하였다(Keil & Delitzsch, p. 109.). 후자의 견해를 받아들인다면 결국 여자는 남자를 뒤 엎고 그 위에 군림하려는 욕망을 가지는 것으로 이해된다. 전자가 되든지, 후자가 되든지 간에 이러한 모든 것은 결국 남자로 하여금 여자를 다스리게 함에 충분한 근거가 된다.
“다스리다”의 히브리어는 마샬브이다. 원래 마샬은 ‘다스리다, 지배하다, 통치하다’의 듯인데, 본문의 경우와 같이 “브”가 수반될 때에는 ‘통치권을 갖다, 지배 권력을 누리다’의 뜻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죄의 결과로 나타난 남성과 여성에게 주어진 저주이다. 하나님께서 본래 에덴에서 남녀의 동등 됨을 주셨으나 죄로 말미암아 남녀의 상하 지위가 결정되는 방향으로 흐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처음 가정을 이루어 주셨을 때 일부일처의 기본을 채택하셨다. 그러나 죄가 그것을 깨뜨려버렸다. 성경을 통해서 볼 때 일부일처제가 깨어지게 된 시기는 아담의 6대 손에서 나타나는데 이는 가인의 계보를 통해서 보여 진다. 아담의 6대 손은 라멕이라는 인물로서 라멕은 두 아내 곧 아다와 씰라를 취한다(창세기 4장 19절). 이 때로부터 일부다처제가 인류에게 나타났다. 라멕의 첫 아내인 아다는 야발이라는 아들을 얻는다. 여기서 우리는 경제적인 원리로써의 여성의 지위가 점차 낮아졌다는 논리를 주장하는 자들과 상당한 차이를 발견하게 된다. 그들은 원시 농경 사회에서 점차 발달된 목축의 등장으로 여성들의 생산성이 줄어들었고, 점차적으로 여성들은 자기들의 지위를 잃었다고 말했으나, 그러나 성경은 야발이 “육축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다”(창세기 4장 20절)고 말한다. 즉 목축이 시작되었다는 말이다.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경제적인 원인을 들어 여성의 지위가 낮아졌다고 밝히지 않는다. 이미 목축이 시작되기 전에 여성들은 남성들의 억압을 받았음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후로의 성경 시대의 시대적 흐름은 남성이 여성을 억압하고 천대하며, 말 그대로 가부장적 제도가 정착되는 사회로의 발전을 보게 된다. 노동을 통한 생산력의 책임은 그들이 말하는바 대로 여성으로부터 남성에로의 전환이 아니라 죄를 지은 처음부터 아담인 남성의 책임이었고, 경제적 부담의 임무가 남성들에게 주어져 있었다. 다시 강조되는 바이지만 죄의 결과가 이러한 양상을 드러내게 한 것이다.
여성 문제의 기원은 경제적인 원인이 아니라 죄가 이 땅에 들어온 때로부터 시작하였고, 그 때로부터 여성들은 뭇 남성들에게 짓밟히는 삶을 살아야만 했다. 죄는 사단이 가져다 주었지만 그것을 받아들인 자는 여성으로부터 나타난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그 책임을 물어 여성이 남성을 섬기도록 저주하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결정이 영원토록 유효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죄의 문제를 해결 하실 때 까지로의 한정적 책임 추궁일 뿐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여성의 억압이 풀릴 때까지이다. 십자가 사건은 여성의 억압을 그치는 유일한 길이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 이후로 남성으로부터의 여성에 대한 억압은 그쳐져야만 했었다.
여성들이 잃었던 노동력의 회복으로 자신들의 지위가 다시 회복되리라는 어긋난 노력은 전혀 무가치한 것이다. 최근여성들이 직업 전선에 뛰어 들면서 이제는 여성들도 큰 소리 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것은 성경의 원리를 잘 알지 못하는데서 오는 어긋난 논리일 뿐이다. 오직 십자가만이 그 해결책임을 알아야 한다. 다만 이미 그렇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여성들이 억압을 받는 것은 분명한 모순이다. 예수 이후로 바꾸어야 할 것이 그 때까지 여성을 억압하고 조롱하던 기존의 세력들이 해결의 실마리를 풀지 않은 것이다. 뒤에서 살피겠지만 예수는 여성들에게 당시 상황에서는 거의 파격적인 대우를 하셨다. 그리고 잃었던 여성의 지위 회복을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여성 억압이 계속 이어져 오는 원인을 살펴본다면 제자들과 교회의 노력이 상당히 부족했다는 것과(물론 당시 교회 안에서의 노력은 상당히 활발했음은 사실이고, 다만 성경 시대를 벗어나 교회사 시대로 접어들면서 다시 제동을 걸었을 뿐이다), 세상에서, 즉 교회 밖에서의 사람들에게서는 전혀 그러한 노력의 흔적이 없는데, 이는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십자가의 구속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이어져 오던 특권을 버리거나 바꾸어야 할 필요성을 갖지 못했다. 따라서 여성 권리 회복 운동은 먼저는 교회 안에서 일어날 일이요, 그리스도 안에서 해결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요약하면, 여성들이 남성으로부터 억압을 받기 시작한 것은 경제적인 원리에 의해서가 아니다.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의 죄로 말미암아 그 책임에 대한 추궁의 결과로 여성들은 남성들에게 억압을 받아야만 했다. 여성이 억압을 받도록 결정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책임을 한시적으로 허용하셨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한 죄 문제 해결 시까지로 말이다. 이미 예수의 십자가가 모든 문제를 해결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해결되지 못한 여성의 문제는 어떻게 된 것인가? 이것에 대한 책임은 마땅히 교회가 져야 할 문제라고 생각된다. 교회 안에서도 계속된 이러한 여성들의 문제는 바울의 글을 통해서 오해하는 것 때문에 나타나는바, 바울은 “교회에서 여자는 잠잠하라.”했기 때문이다. 이 말을 후대의 우리들이 거르는 과정 없이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 까닭이다. 따라서 우리는 바울의 이런 표현이 과연 여성 억압을 위한 표현이었는지? 어떤 다른 까닭이 있었는지를 살펴보아야만 할 것이다. 바울의 여성관에서 상세히 살필 것이다.
(히브리어가 입력되지 않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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