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여성학/여성-신약여성

바울의여성관(선교적관점)

불로꿀목 2008. 4. 20. 20:40
 

바울의 여성 이해 - 선교적 관점에서

최근 한국 교회 내에서 다루어지는 중요한 의제 가운데 하나는 여성 목사 안수 문제이다. 남녀평등을 부르짖고 있으며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현대의 사회 속에서 아직도 가부장적 제도가 전혀 동요되지 않는 현실을 바라보며 여성들은 자신들의 지위 확보를 위해 부단히 노력해 왔다. 여성 해방 운동이니, 여권 신장이니 하면서 여성 자신들이 사회 속에서 살아갈 길을 다지고 있다. 교회 내에서도 그러한 움직임은 전혀 예외가 될 수 없다. 지금까지 금기시 되어 왔던 여성의 안수 문제가 몇 년 동안 계속 교회에 상정되고 있으며, 몇몇 교회들은 이를 수용하는 실정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아직 많은 교회들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계속 보류시키고 있음을 본다. 중요한 이유는 성경의 가르침이 여성들로 하여금 강단에 서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실제적으로 기독교의 창시자로 불리우는 바울은 교회 내에서 여자가 가르치는 것을 금해야 하는 것처럼 교훈하고 있다. "여자들은 교회 내에서 잠잠하라"(고전 14:34)고 했으며, "여자는 조용히 복종하는 가운데 배워야 하며, 나는 여자가 남을 가르치거나 남자를 지배하는 것을 허락지 않는다"(딤전 2:11).

뿐만 아니라 바울에게 있어서나 신약의 전반적인 가르침은 여자가 남자보다 앞서지 못하다는 것을 권장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항상 여자는 남자의 수하에서 존재할 가치로서의 지위를 보여 주는 듯하다. 베드로는 "아내들도 마찬가지로 남편에게 반드시 복종해야 한다"(벧전 3:1)고 가르칠 뿐 아니라 바울 역시 "남편은 아내의 주인"(엡 5:23)이라고 하였다.

가부장적인 사회 구조적 제도 속에서 이러한 제도를 역류하고 남성과 같은 동류의 지위를 확보하려는 여성들의 활동은 찬사를 받아 마땅하다. 그저 여자니까? 라는 인식 속에서 살지 않고 여성으로서의 지위를 스스로 찾겠다는 그들의 의지는 대단한 것이다. 그러나 여성을 억류하고 있는 남성들을 향해 자신들의 지위 확보를 위한 투쟁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겪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억압받고 있는 여성들의 지위 확보는 여성들의 운동으로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들을 누르고 있는 남성들이 발 벗고 나서서 해방 시켜 주어야 진정한 여성 해방이 되는 것이다. 억압된 자 스스로 아무리 발버둥 쳐야 쥐고 있는 기득권자가 풀어주지 않는데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겠는가? 따라서 남성들 스스로 가부장적인 모순들을 제거하고 억압받는 여성들을 그 구속에서 벗어나도록 해 주어야만 할 것이다.

여성이 여성으로서 살도록 보장해야 하는 것은 남성들의 몫이다. 왜냐하면 여성은 남성에 의해 속박된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고 하나님이 은혜로서만이 가능함과 같이, 노예가 스스로의 노력으로 노예에서 해방 받을 수 없고 그 주인이 은혜를 베풀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여성이 남성의 지배 아래 있기 때문에 그 남성으로부터 해방을 받기 위해서는 칼자루를 쥐고 있는 남성들로부터 은혜를 입어야 한다. 이러할 때 진정한 여성의 권리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여성 해방운동은 여성들만의 운동이 아니라 남성들에 의한 운동이 되어야 한다.

성경시대, 즉 구약시대나 신약의 시대의 사회적 상황은 역시 가부장적 사회이기 때문에 그 문화 속에서 여성의 권리를 찾기는 어렵다. 우선 이 글을 전개함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절차를 밟는다. 첫째는 여성들의 활동을 제한하고 있는 근거로 나타나는 신약의 본문들을 찾아 주석하려고 한다. 이때 단순한 글자 그대로의 해석의 모호성을 지적하며 전후 문맥과 관련하고, 다음에 사회적 상황 하에서의 신약의 그러한 가르침일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설명하고자 한다. 둘째, 신약에서 나타난 여성들의 활동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어느 선까지가 여성들의 활동 범위였는지를 밝히면서 그 선상이 과연 오늘날 여성들의 활동을 제한하는 상한선인가를 밝히고자 한다. 셋째는 하나님의 창조질서와 관련하여 여성의 위치를 파악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여성에 대한 어떤 관점을 가졌는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1. 여성들의 활동을 제한하고 있는 성경의 본문 분석

1) 고린도 전서 14장 34-36절(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34절 -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35절 -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호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임이라

36절 -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 아니다


김응조 "여자는 집회 시에 침묵할 것을 명하였다. 고리도 교회는 여권주의가 많은 폐단을 가져옴으로 여자의 언권(말하는 권리)을 금하였다. 여자는 가정이나 교회에 남자를 교훈하는 것을 금하였다. 교회에서 여자는 창 3:16의 원리를 따라 순종의 태도를 취하여야겠다. 남자를 가르치는 태도는 부당하다. 즉 남자들 앞에서 말하는 것은 순종의 미덕에 위반되는 태도로서 자기를 남자위에 두려는 생각이다. 해방된 고린도 교회에는 여자들의 이 같은 성향이 없지 아니했다"(강해 136). 그러나 요해에서는 그 같은 입장이 조금 바뀐다. 바울의 이러한 교훈은 당시 교회의 사정으로는 불가피한 교훈으로 오늘날 교회 내에 부인의 역할이 많은 것에서 전적으로는 적용하기 곤란한 말이다. 요는 부인은 순종이 필요하다, 순종이 없는 태도는 원리에 부합한 행위이다(138). 즉 바울의 이러한 교훈은 당시의 풍속에 일임해야 하고 오늘날에는 일반적으로 통용될 사실이라고는 할 수 없다는 것이다(137). 영해에서 그는 여자는 그리스도의 신자 된 신부의 모형이라고 한다. 이 영해에 의하면 결국 신자는 그리스도를 가르칠 수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칼빈의 해석 : 가르치는 권세는 여성들의 직무가 아니다. 왜냐하면 만일 여성이 가르치면 그는 모든 남성들을 지배하게 되는데 이것은 여성이 마땅히 복종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칼빈은 가르침을 받는 것은 곧 그 지배 아래 있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칼빈 주석 416). 가르치는 자는 가르침을 받는 자 위에 군림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왕이 신하에게 가르침을 받는다면 그것은 신하가 가르치기 때문에 왕 위에 군림하는 것인가? 또 하나의 문제는 칼빈 당시 역시 남성 주도권의 사회에 서 있었던 시대라는 사실이다. 여성 해방 운동이 사회 운동으로서 표면화 된 것은 1970년대 초기였고, 그 역사적인 배경은 1792년의 엠 월스톤크라프트에 의해 시작되었다. 남녀 성차별 철폐 운동은 1960년대 후반의 비 프리던스 여사와 동류들에 의해 전미여성연맹을 결성한 것이 사회운동으로서의 여성 해방 운동에 불씨를 붙인 계기가 되었다.

데이빗 토마스의 해석 : 바울은 분명히 이 말이 일반적인 법칙이 되며 정상적으로 준수되어질 것을 의도했다. 왜냐하면 이 말을 딤전 2:11, 12절에서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시 이 말을 특별한 때와 상황에 관련해서 해석하는 것도 타당하며 신구약에서 예외를 허용했다. 그럼에도 기독교는 여성들을 해방시켰으나 여성들을 남성들과 동등하게 두지는 않았다(풀핏주석 352). 그러나 설교 편에서 헌달(E. Hurndall)은 다음과 같은 토를 달고 있다. "사도의 목적은 그 행위의 공적인 특성에 대한 것이었으며 바로 이 장에서 그가 교회의 모임을 말할 때 그는 믿지 않는 자들이 참석할 수 있었던 모임에 대하여 말했다"(24절)(385). 즉 이방인들의 참여로 이한 여성의 가르침을 막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곧 당시 사회의 상황을 고려한 바울의 선교적 관점에서 시대를 역행하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다. 같은 책의 설교자인 알 터크(R. Tuck) 역시 여성의 위치를 깊이 생각해야 할 것으로 말하고 있는데 여성의 공적인 지위와 관계에 관련된 동방적이고 유대적이며 이교적인 감정들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여성들이 기독교로 개종해서 개인적인 신앙생활을 인식하게 되고 영적인 은사들을 부여 받았을 때 발생했던 실제적인 난점들과 이 주제에 대한 바울의 교훈의 방식들을 서구 문명과 다행히도 현대의 특징이 되는 여성들의 사명에 대한 보다 현명하고 훌륭한 개념들에 적용해서 조정될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396).

에이 티 로버트슨의 해석 : "잠잠하라"는 동사 시가토산(σιγἀτωσαν)은 28절과 30절에서 방언과 예언을 말하는 자에 의하여 야기되는 무질서를 말하는데 사용되었다. 본 절은 몇 몇 여인들이 공중 예배에서 복장(11:2-16)과 말로써 말썽을 일으켰기 때문에 말해진 것이다. ~~ 오늘날 이 문제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적용할 수 없는 특별한 경우에 해당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오늘날 주일학교에서는 여성들이 대부분의 교육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빌립의 딸들도 예언자였으므로 본문에서 바울이 뜻한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려면 남성과 여성이 피차를 용납하고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원어연구해설, 370).

핸드릭슨의 해석 : 어떤 교회에서도 여자들의 공중 앞에 말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여자가 공중 앞에서 말하는 것은 기독교 정신에 위배되는 것이다. 구약 요엘서 2장 17절에서 '너희의 아들들과 딸들이 예언할 것이다"는 말은 오순절날 입증된 것이며(행 2:17), 행 21장 9절에서 빌립의 네 딸들이 예언한 것으로서 예언은 이루어졌다. 여자도 은사는 받지만 공적인 활용은 금지된 것이다. 고린도 교인들이 도입하고 싶어 했던 것으로 생각되는 관습은 기존의 관례에 위배되는 것이다. 유대인과 헬라인이 다 같이 동일한 규칙(여자가 공중에서 말하는 것을 금하는)을 채택했다.

종합적 결론 : 몇몇의 신학자들의 주석은 여자가 남자들 앞에서 공중 예배시 가르치는 것은 금한 것으로 밝히고 있다. 칼빈은 절대적인 것으로 말하고 있고 어떤 토도 달지 않았다. 헨드릭슨도 기독교 정신에 위배됨을 말한다. 단 그는 당시 사회가, 즉 유대인 세계에서나 헬라 세계에서 여자들의 활동이 금지되어 있었음을 추가하고 있다. 로버트슨은 오늘날의 상황 하에서는 재고되어야 할 것으로 말하고 있고, 토마스는 신구약에서 예외는 두고 있지만 성경이 결코 남성과 여성을 동등하게 취급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헌달은 믿지 않는 사람들의 참여된 집회를 염두에 둔 것이라고 했으며, 터크는 여성의 공적인 지위는 동방적이고 유대적이며 이교적인 감정들을 재고해야 할 필요가 있으며 오늘날 사회에서는 재적용 조정할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김응조 역시 여성의 가르침은 억제되어야 하지만 그것의 진정한 의미는 당시 사회의 풍습에 일임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우리는 여기서 어떤 한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칼빈을 제외한 여러 신학자들은 여성의 공적인 가르침이 금지된 것은 당시 사회의 형편을 고려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헌달의 표현과 같이 이교도들이나 믿지 않는 사람들이 집회에 참석했을 때를 염두에 둔 것이다. 그들이 집회 참석시 시대적 풍습을 뛰어 넘는 여성들의 가르침을 받는다고 생각해 보라. 그들에게 과연 복음이 확산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도리어 복음의 확산을 가로막는 것이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바울의 여성관이 남성에 의해 지배되는 실체는 아니었다. 그는 남성과 여성이 한 유기체로서 공존의 실체로 보고 있다. 이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관점이며, 창조의 원리이다. 이것에 관하여는 다음의 에베소서 해석을 참고하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여성을 남성의 수하에 있는 것과 같은 표현들을 함에 있어서는 다른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서정운은 바울을 선교 신학자로 규정하고 있으면서 "그의 신학은 선교적 관점에서 볼 때만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고 하였다. 바울의 이러한 관점은 옳다고 본다. 왜냐하면 바울에게 있어서 그는 신학을 정립하기 위한 글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교회의 확장을 위한 것에 초점을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허들런드는 "바울의 서신서들은 선교적 맥락에서 씌여진 것"이라고 하였다. 그 자신이 직접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으며, 죽기까지 선교 활동을 하였다는 것은 이를 잘 뒷받침 한다. 사도 바울은 선교 사역을 감당함에 있어서 원칙을 세웠다. 가장 기본적이며 확고한 그의 사고는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에게 맞추어, 율법 아래 있는 자에게는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율법 없는 자에게는 율법 없는 자같이, 약한 자들에게는 약한 자와 같이"였다.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고전 9:19-22)라고 말하는 바울을 보라. 단 하나의 궁극적인 목표, 즉 어떻게 해서든지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일을 수행하기 위함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여자와 남자는 다른 객체가 아니었다. 전혀 다른 세계의 존재가 아니었다. 이것은 비단 여자와 남자 사이만이 아니라 종이나 자유자나,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누구든지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된 것이며(고전 12:13),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고 그 안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며 약속을 따라 유업을 이을 자이다(갈 3:28-29).

따라서 바울은 오직 선교를 위한 일념으로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전 10:32-33)고 하였다. 이 권면은 고린도 교회 여자들의 복장 문제를 다루기 이전에 기록하고 있으며(11:2-16), 계속 이어지는 여자의 가르침을 권면하는 것이다(14:34-36). 결국 바울의 이러한 표현은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하다거나, 지배하는 관계 속에서 말한 것이 아니라 그 당시의 사회적 풍습을 따라 여자가 남자를 가르치는 일을 금하고 있는 것이다. 오직 선교를 위해서 말이다.  짐작컨대 어쩔 수 없는 복음 전파의 일로 인한 교훈이었다는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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